글을 잘 쓴다는 것이, 단위 시간당 많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덜어내는 것은 어렵다. 적은 문장으로 독자를 이해시키고, 짜임새있게 정리하여 글이 잘 읽히도록 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량인 것 같다.


자료에는 글이 필수적이다. 도식이나 이미지는 이해를 돕는 보조적인 도구이다. 글은 정보를 담는 그릇이고, 정보를 위계와 논리에 맞게 구성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지적 행위이다.

GPT는 인간의 자연어를 학습하여 따라하고 있고 그 유사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다만 생각을 하고 글을 뱉지 않고, 글을 말이 되는 방향으로 뱉어간다. 코딩은 잘해도, 아직 기획은 부족한 듯하다. 코딩도 물론 어렵지만, 기획은 종합적인 정보를 특정 관점을 견지한 채로 해석하고 소화한 뒤, 이니셔티브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더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 ‘완벽한 가라는 진짜다’ GPT도 비슷한 정도가 구별할 수 없는 정도가 되면 진짜가 되는 것. ‘얘가 정말 생각하는거 아니야?’라는 위기 섞인 의문이 들 수 있다.


점점 GPT에게 의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해준다. 인간은 기술을 활용해서 힘든 노동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그런데 생각하는 일은 좀 다르게 바라봐야할 것 같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현재 의견을 묻고, 자료를 조사하고, 데이터를 추출해서 새롭게 모델링하는 등의 일을 생성형 AI와 함께한다 했을 때는 큰 거부감이 없다. 왜냐하면 지시의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전된 생성형 AI에게 점점 생각을 의존하고 지적활동을 더욱 게을리하게 되면, 뇌는 퇴화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보를 구성하고 지식을 방출하고 교류하는 일련의 활동을 잘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문장을 잘 작성하지 못하게 되고, 완결된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의존 정도가 심화되면 추상적인 ‘해줘’ 빈도가 높아질 것이고, 언젠가 생각의 지휘까지도 AI에게 미루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생산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쇼츠 시청과 게임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게 AGI까지 갈 것도 없고, 생성형 AI가 조금만 더 정교해져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같다. 그러면 크게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인간 사회가 다시 지배계층/피지배계층으로 재편될 수 있다. 언젠가 이 부분이 주요 사회적 아젠다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 먼 미래가 아닐 수 있다.

비판적 사고로부터 멀어진 대다수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을까?


나는 불안 정도가 높은 편인 것 같다. 정리하지 않으면 휘발될 것 같고, 그게 불안해서 어딘가에 자꾸 보관하고 싶어지는 것. 최적화에 대한 열망도 강하다. 내가 작성해둔, 정리해둔 어떤 지식들이 서랍장안에 체계적으로 정돈되어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나중에 활용하려 했을 때 바로 찾을 수 있게끔 하는 시스템을 원한다.

생각을 글로 쓰면 마음이 안정된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안되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또한 체계적 정돈이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것들을 종이에 넣어놓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페이지를 또 적절한 곳에 정돈해놓을 수 있다. 이 블로그도 마찬가지.


모듈화는 중요하다. 지식도 모듈화되어 이곳 저곳에서 쓰인다. 우리가 수능준비할 때 했던 지구과학, 물리 등의 과목들도 따지고 보면 ‘지식 모듈’들일 것이다. 코드도 모듈화하면 활용가능성이 높아진다. 특정 단위로 묶어놓았기 때문에 정돈하기 쉽고, 나중에 꺼내서 다른 것과 접목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뭐든 모듈화하면 그런 것 같다.




‘삶 자체가 길고 긴 하나의 면접이 되어가고 있다.’ 이 말을 듣고 3분 동안 멍했다.

지주와 소작농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산적 분류에서 연속적 분류로 스팩트럼이 넓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0과 1, 지배와 피지배로 구분짓는 대신에 살고 있는 아파트와 걸친 옷, 직업과 연간 소득으로 구분지어 진다. 그것은 물질자본(돈)으로 부터 파생된다.

부유함을 위해, 결국 행복 추구를 위해 삶을 ‘면접화’하고 있는 것 같다. 생산성 투쟁을 한다. 시험을 통해 검증받거나, 성과를 내서 근거를 만든다. 사회주의 체제가 ‘실패’했다고 표현되는데, 자본주의 또한 실패할 수 있다. 자본 양극화, 희망 상실, 무한 비교와 절망으로 저출산과 무기력, 생산력 저하를 낳는다면, 해당 국가는 자본주의의 ‘생산성 향상 flywheel’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이, 단위 시간당 많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덜어내는 것은 어렵다. 적은 문장으로 독자를 이해시키고, 짜임새있게 정리하여 글이 잘 읽히도록 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량인 것 같다.


자료에는 글이 필수적이다. 도식이나 이미지는 이해를 돕는 보조적인 도구이다. 글은 정보를 담는 그릇이고, 정보를 위계와 논리에 맞게 구성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지적 행위이다.

GPT는 인간의 자연어를 학습하여 따라하고 있고 그 유사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다만 생각을 하고 글을 뱉지 않고, 글을 말이 되는 방향으로 뱉어간다. 코딩은 잘해도, 아직 기획은 부족한 듯하다. 코딩도 물론 어렵지만, 기획은 종합적인 정보를 특정 관점을 견지한 채로 해석하고 소화한 뒤, 이니셔티브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더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 ‘완벽한 가라는 진짜다’ GPT도 비슷한 정도가 구별할 수 없는 정도가 되면 진짜가 되는 것. ‘얘가 정말 생각하는거 아니야?’라는 위기 섞인 의문이 들 수 있다.


점점 GPT에게 의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해준다. 인간은 기술을 활용해서 힘든 노동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그런데 생각하는 일은 좀 다르게 바라봐야할 것 같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현재 의견을 묻고, 자료를 조사하고, 데이터를 추출해서 새롭게 모델링하는 등의 일을 생성형 AI와 함께한다 했을 때는 큰 거부감이 없다. 왜냐하면 지시의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발전된 생성형 AI에게 점점 생각을 의존하고 지적활동을 더욱 게을리하게 되면, 뇌는 퇴화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보를 구성하고 지식을 방출하고 교류하는 일련의 활동을 잘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문장을 잘 작성하지 못하게 되고, 완결된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의존 정도가 심화되면 추상적인 ‘해줘’ 빈도가 높아질 것이고, 언젠가 생각의 지휘까지도 AI에게 미루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생산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쇼츠 시청과 게임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게 AGI까지 갈 것도 없고, 생성형 AI가 조금만 더 정교해져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같다. 그러면 크게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인간 사회가 다시 지배계층/피지배계층으로 재편될 수 있다. 언젠가 이 부분이 주요 사회적 아젠다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 먼 미래가 아닐 수 있다.

비판적 사고로부터 멀어진 대다수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을까?


나는 불안 정도가 높은 편인 것 같다. 정리하지 않으면 휘발될 것 같고, 그게 불안해서 어딘가에 자꾸 보관하고 싶어지는 것. 최적화에 대한 열망도 강하다. 내가 작성해둔, 정리해둔 어떤 지식들이 서랍장안에 체계적으로 정돈되어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나중에 활용하려 했을 때 바로 찾을 수 있게끔 하는 시스템을 원한다.

생각을 글로 쓰면 마음이 안정된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리가 안되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또한 체계적 정돈이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것들을 종이에 넣어놓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페이지를 또 적절한 곳에 정돈해놓을 수 있다. 이 블로그도 마찬가지.


모듈화는 중요하다. 지식도 모듈화되어 이곳 저곳에서 쓰인다. 우리가 수능준비할 때 했던 지구과학, 물리 등의 과목들도 따지고 보면 ‘지식 모듈’들일 것이다. 코드도 모듈화하면 활용가능성이 높아진다. 특정 단위로 묶어놓았기 때문에 정돈하기 쉽고, 나중에 꺼내서 다른 것과 접목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뭐든 모듈화하면 그런 것 같다.




‘삶 자체가 길고 긴 하나의 면접이 되어가고 있다.’ 이 말을 듣고 3분 동안 멍했다.

지주와 소작농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산적 분류에서 연속적 분류로 스팩트럼이 넓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0과 1, 지배와 피지배로 구분짓는 대신에 살고 있는 아파트와 걸친 옷, 직업과 연간 소득으로 구분지어 진다. 그것은 물질자본(돈)으로 부터 파생된다.

부유함을 위해, 결국 행복 추구를 위해 삶을 ‘면접화’하고 있는 것 같다. 생산성 투쟁을 한다. 시험을 통해 검증받거나, 성과를 내서 근거를 만든다. 사회주의 체제가 ‘실패’했다고 표현되는데, 자본주의 또한 실패할 수 있다. 자본 양극화, 희망 상실, 무한 비교와 절망으로 저출산과 무기력, 생산력 저하를 낳는다면, 해당 국가는 자본주의의 ‘생산성 향상 flywheel’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Last updated on

2024.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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