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1.
2025. 1. 11.
안티프레질
안티프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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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서적이라고 봐야할 지,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봐야할 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 이러한 느낌의 책을 어떻게 대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이는 나심 탈레브 저자의 ‘블랙스완’을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입니다. 공통적 특성을 추출하여 새로운 관념을 담은 <단어>를 만들고, 이 <단어>에 내포된 프레임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례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글을 서술합니다.
저는 이러한 법칙적 사고로 쓰여진 글에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어떠한 관점을 지니면 좋을 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읽으셨는 지 그 과정도 궁금합니다.
저자는 ‘근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어설픈 합리주의를 갖고 무작위성을 제거하려하는 것이 비단 좋은 일 만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시행착오가 언어능력을 늘리듯 고통과 억압 등의 부정적 작용이 오히려 강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무작위성이 소위 ‘곤란한 상황’을 연출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만 이것은 ‘생명체(유기체)’에게 국한되며, 그 반대에 있는 기계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재료 피로’ 현상으로 손상됩니다. 생명체는 그 낮은 수준의 스트레스, 호르메시스의 부재로 오히려 손상된다고 합니다.
근대는 이러한 무작위성을 통제하려 하는 의도입니다. 단순계와 달리 복잡계에서는 개연성 파악이 말 그대로 복잡합니다. 누르면 스위치가 켜지는 명확한 ‘인과’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 Casual Opacity가 낮은 상황에서는 스트레스 수준을 낮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내용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부드럽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보다 드문드문하지만 불확실하고 임팩트가 큰 스트레스가 낫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안티프레질 반응의 발동요건이 됩니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혁신을 이룩하기 위해서 ‘곤경’은 필요조건 정도 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격언이 사실은 에너지 넘치는 시절의 ‘외상 후 성장’을 장려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위 문구를 필두로 하여 저자의 서술 방식에 조금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사이트를 넓히기 위해서 ‘경험적 서술’이나 ‘통계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편입니다. 자신이 만든 프레임워크를 갖고, 현상을 분석하는 것에는 큰 공감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같은 현상을 놓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저에게는 그 의미가 크게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고, 기존에 계속 했던 주장을 표현만 다르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는 서두에 여쭤본 ‘다른 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는 지’에 대한 의문과도 연결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체-개인 관계를 분석할 때도 프래질-안티프래질 개념을 지속적으로 참고합니다. 개별적 래스토랑은 프래질하지만, 그 district는 안티프래질하다. 즉 개인의 프래질을 바탕으로 집단이 안티프래질해진다. 시스템이 발전하려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적자생존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우수한 커피 메이커가 탄생한 것은 앞선 경험과 지식이 전승된 것입니다. 식당이 모여 상권이 생기면, 경쟁이 불가피해져 성장동력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고객의 좋은 경험으로 이어지고 해당 구역에 대한 이미지가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안티프래질’의 프레임워크 속에 들어가서 그저 서술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과연 혁신에 무작위성이 본질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유의지가 본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슷한 말일 수 있습니다. 통제는 무작위랑 반대되고, 통제된 환경에서는 자유의지가 오롯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싫증이 난다는 것이 ‘답답함’의 관점이라면 주체성의 상실로 해석할 수 있고 그것은 자유의지의 부재일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 문득 ‘교통수단이 고도로 발달해서 사고가 날 확률이 0에 수렴하는 세상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망·부상자가 줄어들고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함도 들었습니다. 다소 부정적인 동기이겠지만 사고를 낼 수 있는 확률도 없어진다는 것에서 자유의지를 침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사실 통제가능한 안전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 교통사고가 없어지는 세상은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인 것이지, 내가 교통사고를 낼 수 조차 없게 되는 것은 뭔가 답답하다’는 심상으로 미루어 보아, 결국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해냈다에서 오는 우월감에서 해당 이상적 상황이 타당해보였을 수 있겠습니다. 그저 객체 중 일부가 되었을 때는 자유의지가 침해되는 상상이 먼저 듭니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교통사고 없는 세상’이 무작위성이 상실된 상황이며, 곤경이 발생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집단 속 프래질한 개인이 실패할 여지가 없어지며, 참고할 실패 사례가 없다보니 사회의 성장이 저해됩니다.
뭔가 그럴 듯하면서도 이질감이 드는 것은, ‘곤경이 혁신을 만든다’는 주장이 ‘집단-개인’간의 안티프래질과 다소 거리감이 있다는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커리어 관점에서 ‘hedge하지 마라’라는 입장에 동의합니다. hedge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경쟁우위를 갖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내 가장 큰 실수는 hedge 하는 습관이었던 거 같다. 내 주변에서 연구에 올인한 사람들은 탑티어 컨퍼런스 논문이나 SCI 저널 논문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내 주변에서 창업에 올인한 사람들은 YC, a16z SR 등에 투자를 받았다. 수년이 지나도, 성실하게 살아도, 아무것에도 올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 - toby kim
실패는 필연적입니다. 성공 실패라는 단어가 행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그냥 계속 하는 건데, 계획이 생기고 그것을 hedging하는 여러 옵션들을 넣으면서 재미가 없어집니다. 근대적 사고입니다. 예방하려하기 보다 실수와 두려움을 딛고 싸워나가야 합니다.
저는 2017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스타트업 창업을 꿈꿨습니다. 멋있어보였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누군가는 자본주의 계층이동 사다리의 막차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미국에 가라고 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재수를 했습니다. 대학에 왔고 코로나 터지고 군대에 다녀왔습니다. 23년 4월 전역을 해서, 1년은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에 다녔습니다. 24년에는 처음으로 대학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고 못해본 대학생활을 경험했습니다. 25년이 왔습니다. 이렇게 말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도전을 감행하려 합니다.
프레임워크에 압도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논리와 시장성, 팀 핏 등 여러 조건에 갇혀있다보니 시작이 어려웠습니다. 계획하고 hedging하려고 했습니다. 무작위성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고 말입니다. 야망 fatigue가 Low level stress의 부재로 발생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마음을 먹은 것은 24년 8월 즈음이었습니다. 원인이 되는 큰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그 순환에서 탈출했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됩니다. 예측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잡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는 줄곧 ‘미래의 모습’에 집중했었는데, 이제 ‘현재의 행동’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앞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개별적 ‘프래질’로서 실패하게 되고 그것이 누군가의 성장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경쟁우위를 갖기 위해 hedging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전략이라면 전략일 수 있겠습니다.
경제학 서적이라고 봐야할 지,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봐야할 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 이러한 느낌의 책을 어떻게 대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이는 나심 탈레브 저자의 ‘블랙스완’을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입니다. 공통적 특성을 추출하여 새로운 관념을 담은 <단어>를 만들고, 이 <단어>에 내포된 프레임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례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글을 서술합니다.
저는 이러한 법칙적 사고로 쓰여진 글에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어떠한 관점을 지니면 좋을 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읽으셨는 지 그 과정도 궁금합니다.
저자는 ‘근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어설픈 합리주의를 갖고 무작위성을 제거하려하는 것이 비단 좋은 일 만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시행착오가 언어능력을 늘리듯 고통과 억압 등의 부정적 작용이 오히려 강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무작위성이 소위 ‘곤란한 상황’을 연출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만 이것은 ‘생명체(유기체)’에게 국한되며, 그 반대에 있는 기계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재료 피로’ 현상으로 손상됩니다. 생명체는 그 낮은 수준의 스트레스, 호르메시스의 부재로 오히려 손상된다고 합니다.
근대는 이러한 무작위성을 통제하려 하는 의도입니다. 단순계와 달리 복잡계에서는 개연성 파악이 말 그대로 복잡합니다. 누르면 스위치가 켜지는 명확한 ‘인과’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 Casual Opacity가 낮은 상황에서는 스트레스 수준을 낮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내용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부드럽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보다 드문드문하지만 불확실하고 임팩트가 큰 스트레스가 낫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안티프레질 반응의 발동요건이 됩니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혁신을 이룩하기 위해서 ‘곤경’은 필요조건 정도 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격언이 사실은 에너지 넘치는 시절의 ‘외상 후 성장’을 장려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위 문구를 필두로 하여 저자의 서술 방식에 조금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사이트를 넓히기 위해서 ‘경험적 서술’이나 ‘통계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편입니다. 자신이 만든 프레임워크를 갖고, 현상을 분석하는 것에는 큰 공감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같은 현상을 놓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저에게는 그 의미가 크게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고, 기존에 계속 했던 주장을 표현만 다르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는 서두에 여쭤본 ‘다른 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는 지’에 대한 의문과도 연결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체-개인 관계를 분석할 때도 프래질-안티프래질 개념을 지속적으로 참고합니다. 개별적 래스토랑은 프래질하지만, 그 district는 안티프래질하다. 즉 개인의 프래질을 바탕으로 집단이 안티프래질해진다. 시스템이 발전하려면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적자생존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우수한 커피 메이커가 탄생한 것은 앞선 경험과 지식이 전승된 것입니다. 식당이 모여 상권이 생기면, 경쟁이 불가피해져 성장동력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고객의 좋은 경험으로 이어지고 해당 구역에 대한 이미지가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안티프래질’의 프레임워크 속에 들어가서 그저 서술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과연 혁신에 무작위성이 본질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유의지가 본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슷한 말일 수 있습니다. 통제는 무작위랑 반대되고, 통제된 환경에서는 자유의지가 오롯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싫증이 난다는 것이 ‘답답함’의 관점이라면 주체성의 상실로 해석할 수 있고 그것은 자유의지의 부재일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 문득 ‘교통수단이 고도로 발달해서 사고가 날 확률이 0에 수렴하는 세상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망·부상자가 줄어들고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함도 들었습니다. 다소 부정적인 동기이겠지만 사고를 낼 수 있는 확률도 없어진다는 것에서 자유의지를 침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사실 통제가능한 안전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 교통사고가 없어지는 세상은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인 것이지, 내가 교통사고를 낼 수 조차 없게 되는 것은 뭔가 답답하다’는 심상으로 미루어 보아, 결국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해냈다에서 오는 우월감에서 해당 이상적 상황이 타당해보였을 수 있겠습니다. 그저 객체 중 일부가 되었을 때는 자유의지가 침해되는 상상이 먼저 듭니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교통사고 없는 세상’이 무작위성이 상실된 상황이며, 곤경이 발생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집단 속 프래질한 개인이 실패할 여지가 없어지며, 참고할 실패 사례가 없다보니 사회의 성장이 저해됩니다.
뭔가 그럴 듯하면서도 이질감이 드는 것은, ‘곤경이 혁신을 만든다’는 주장이 ‘집단-개인’간의 안티프래질과 다소 거리감이 있다는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커리어 관점에서 ‘hedge하지 마라’라는 입장에 동의합니다. hedge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경쟁우위를 갖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내 가장 큰 실수는 hedge 하는 습관이었던 거 같다. 내 주변에서 연구에 올인한 사람들은 탑티어 컨퍼런스 논문이나 SCI 저널 논문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내 주변에서 창업에 올인한 사람들은 YC, a16z SR 등에 투자를 받았다. 수년이 지나도, 성실하게 살아도, 아무것에도 올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 - toby kim
실패는 필연적입니다. 성공 실패라는 단어가 행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그냥 계속 하는 건데, 계획이 생기고 그것을 hedging하는 여러 옵션들을 넣으면서 재미가 없어집니다. 근대적 사고입니다. 예방하려하기 보다 실수와 두려움을 딛고 싸워나가야 합니다.
저는 2017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스타트업 창업을 꿈꿨습니다. 멋있어보였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누군가는 자본주의 계층이동 사다리의 막차일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미국에 가라고 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재수를 했습니다. 대학에 왔고 코로나 터지고 군대에 다녀왔습니다. 23년 4월 전역을 해서, 1년은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에 다녔습니다. 24년에는 처음으로 대학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고 못해본 대학생활을 경험했습니다. 25년이 왔습니다. 이렇게 말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도전을 감행하려 합니다.
프레임워크에 압도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논리와 시장성, 팀 핏 등 여러 조건에 갇혀있다보니 시작이 어려웠습니다. 계획하고 hedging하려고 했습니다. 무작위성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고 말입니다. 야망 fatigue가 Low level stress의 부재로 발생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마음을 먹은 것은 24년 8월 즈음이었습니다. 원인이 되는 큰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그 순환에서 탈출했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됩니다. 예측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잡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는 줄곧 ‘미래의 모습’에 집중했었는데, 이제 ‘현재의 행동’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앞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개별적 ‘프래질’로서 실패하게 되고 그것이 누군가의 성장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경쟁우위를 갖기 위해 hedging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전략이라면 전략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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