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맘때면 몸이 아프곤 했다. 생일 즈음해서, 학창 시절 때부터 그랬다. 올해는 별 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나 하던 찰나에, 그저께부터 목이 조금씩 아파왔다. 견딜만했는데, 오늘 갑자기 큰 피로가 몰려와서 일찍 집에 들어왔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여러 잡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근에 치원이형이랑 이야기하면서, 글쓰는게 어렵다고 푸념하듯 늘어놓았다. 글은 네가 쓰고 싶을 때 쓰는 거고 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굳이 써야하나 라는 그의 말에 그런가 싶으면서도, 일종의 종교 의식같이 내 삶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나의 감정과 상태에 대해 조금 더 면밀히 진단할 수 있으니, 의지에 맡기는 대신 의무를 지우는 것도 좋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년 회고를 썼었다. 2024년 까지는 그랬다. 지금이 2026년 3월이니까, 2025년에 대한 글은 아직 없다. 이 글의 목적이 작년에 대한 회고는 아니겠지만, 뭐 새해 1분기에 작성하는 글이니, 적당히 작년 회고로도 퉁쳐보려고 한다. (이왕 몇 년째 회고를 썼으니 계속 이어가보자는 생각인가)


몇 가지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나의 일과 삶에 대한 생각이다.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와도 다소간 맞닿아있다. 나는 이 산을 넘어야만 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지.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가야만 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체제, 자본주의,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 정도. 게임이랑 유사하다. 캐릭터의 특성과 게임 내 규칙을 알아야만, 전략적으로 플레이해서 좋은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지난한 고민의 산물이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속에 내 개성과 철학이 담겨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유용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받고 그들의 삶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싶었다. 일종의 정복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마냥, 사람들에게 내 에고를 감염시키기 — 뭐 이런 욕망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한다면, 이기적인 유전자의 동작일 지라도 나름 괜찮은 욕구의 표출이라고 생각했다.

각설하고,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했다. 소프트웨어가 좋아서는 아니다. 나는 공간을 구성하거나, 작동하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적지 않은 관심이 있다. 단지 초기 비용이 가장 덜 들면서 임팩트는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발현할 수 있는 가치의 상한도 명확해보였지만, 어쨌거나 나의 소결론은 전세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용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내 생산성을 발휘해서 현금흐름을 수취하고, 그것으로 다른 회사의 유가증권을 취득하여 자산을 만들어가는 방안도 있었지만, 난 처음부터 나의 자본(equity)을 키워가는 방향을 견지하고자 했다. 이것은 사회 구조 상, 젊은 나이에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가지기 어렵다는 구조적 원인과, 앞서 언급한 창작욕과 정복욕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이것이 내가 스타트업을 시작한 이유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지난 몇 년 간 작성한 회고의 주를 이루고 있다. 어찌보면 많이 퍽퍽하다. 마치 근성장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음식이 닭가슴살이지만, 그 맛은 장담못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

결론이 나있는 상황이면, 그 결론을 붙들어매고 성과를 내면서 나아가야한다. 그 다음에서야 내가 나를 돌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취에 너무나도 목말라있으니까. 지금 Arky라는 도구를 만들고 있는 데,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결정해야할 것들이 산더미이고, 매일매일 새로운 이슈가 터진다. 내가 일이고, 일이 곧 나인 상황에서, 한가로이 나에 대해 골몰할 여유가 없다고 느껴졌다. 피로사회 한병철 저자가 짚은,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자기착취의 폭주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색적 삶과 멀어져 버린 것인가? 나=일이면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게 결국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쓸 여유가 없다고 느껴졌나보다. 그럼에도 요즘들어 떠오르는 주제가 몇 가지 있었고, 오늘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을 기념하여, 몇 자 적어본다.


우선 드는 생각은 주의집중력이다. 종이에 적다가 지금 Arky에 적고 있는데, 표현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너무 답답하다.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기 전에 다른 주제로 튀어버리면, 그 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가 어려워진다. 마치 요즘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쇼츠/릴스로 주제가 계속해서 바뀌어버리고, 특정 콘텐츠에 깊이있게 몰입하는 게 더욱 어려워진 세상, 집중력이 결핍된 세상.. 집중은 곧 몰입이고, 러너스 하이와 유사하게 지적활동을 하며 오는 카타르시스가 존재할 것인데, 인간의 지능이 점차 외주화되어가는 지금, 인간의 존재의미는 결국 쾌락과 유희활동에서 찾아야하는 것인가 — 라는 심오한 생각까지가 한 턴에 났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추상적인 개념과 눈앞에 나타난 실제 대상 사이의 갑작스러운 불일치를 깨달을 때 유머가 발생한다고 했다. 나의 생각 발산 속도가 유머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쨌든 나도 생각이 되게 산만하다는 것..

사실 이런 철학자들의 정의를 차용할 때도, 그 철학자에 대한 존중여부를 차치하고 생각한다해도, 너무 권위에의 호소와 무비판적 사고의 가속을 부르는게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물리 법칙이나 특정 이론에 대한 인용이 아니라 어떤 구절에 대한 인용은, 마치 속담같이 들리는데, 그것이 철학자의 멋들어진 이름과 만나게 되면 뭔가 그럴듯해보이면서 수긍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내가 너무 삐딱한가 싶다가도.. 뭐 그렇다.



최근에 재호와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소 심오한 내용이었다.

크리에이터 문상훈은 본인의 v-log 영상에서 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나를 태교하는 것처럼 지내기로 했다. 몸에 좋은 것을 주고 좋은 마음을 갖고 살면 아이에게 좋듯이, 나에게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양품이다. 뭐 하나가 나와도 되게 좋은 것. 내가 생각하는 양품은 비싸지 않아도 된다. 이게 내가 엄청 많이 적었던 Blackwing이라는 연필인데 ... 글씨 쓰는게 난 너무 좋다. 셀카 잘 나온 것처럼 기분이 좋은데, Blackwing이 왜 양품이라고 생각하냐면, 글씨가 잘 써지는 건 너무 당연한건데, 이 연필 지우개가 다른 연필 지우개랑은 달리 굉장히 잘 지워진다. 연필치고는 비싸냐? 비싸다. 기분 전환을 위해 쓰는 비용에 비해 비싸냐? 비싸지 않다.'


나도 제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좋은 제품, 양품을 만들고 싶었다. 좋은 만듦새를 가진 무언가. 그 좋은 만듦새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디테일이다. 그럼 그 디테일이 뭔데? 어떻게 만드는데?


문상훈씨가 짚은, Blackwing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 무언가를 작성할 때 중요한가? 연필이라면 잘 나오면 그만 아닌가? 지우개는 따로 사서 쓰면 되잖아.

나는 세심함에서 좋은 디자인이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세심함은, 사려깊음에서 나온다. 여러 감각을 이용해 세상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게 되는 배움을 어딘가에 쌓아놓았다가, 제품을 만들 때 자연스레 응용하는 것이다.

언젠가 디자인을 배웠다고 해서 모두 디자인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다소 건방진 말이지만) edge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뭔가 학습이나 커리큘럼 상에서의 단련에서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전적인 영향도 물론 있을 테지만 그건 모든 영역이 그러할 것이고, 내 감각이 얼마나 민감한 지, 세상으로 부터 오는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만의 관점으로 체득하는 지에서 좋은 디자인이 출발한다고 생각했다.

Notion을 만든 Ivan, Cursor의 head of design을 맡고 있는 Ryo, 애플 전성기를 만들었던 Jony, 무인양품 디자인을 총괄한 Hara, 브라운의 디자인을 이끌었던 Dieter까지, 그들이 단순히 스킬셋이 좋아서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UX라고도 표현하지만 — 결국 사람의 경험에 대한 심도있는 고민과 자신만의 관점이 적절히 섞여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걸 직관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결론적으로는 그런 산물이 직관으로 나타나는거라고 생각한다. 가구를 만들든, HCI, HAI를 설계하든 간에 본질은 유사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제품들에는 공통적으로 '브랜드스러움'이 담겨있다. 어떤 부족사회를 만들어낸다. 제품을 매개로 말이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양품의 정의다. 유용하되, 브랜드스러워야 한다. 브랜드스럽기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의 철학적 배경과 관점이 제품에 오롯이 담겨있어야 하고, 좋은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면 세심함을 챙겨야만 한다. 이것은 성향적인 요인도 클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양품이 대중화될 수 있는가?, 아니 반대로는 대중화된 무언가가 양품일 수 있는가? 라는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무인양품이나 애플이 이러한 고민을 불식시켜주고는 하는데, 순수 예술이 되지 않으려면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하고, 그러려면 충분한 유용성이 합리적인 가격대에 제공되어야 한다.


미감, 감도, 혹은 느좋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되는 것 같다. 주변에 옷 입는 것만 봐도 그런 느낌이 드는 친구들이 몇몇 있다. 그들은 감각적이다. 감각적인 이들을 따라하려고 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 authentic함에서 오는 멋이, 그들을 고유하게 만들어준다. 어떠한 심상이 느껴진다는 게 맞는 표현같다. 시각, 후각, 청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추상적인 느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걸 느끼는 것 또한 직관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앞서, '자아'라고 말했는데, 내가 추구하는 미(美)를 세상에 퍼뜨리고 사람들에게 감응시키는 것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것 같다. 그저 그런 자동차를 만드는 게 아니라, 포르쉐를 만들고 싶었던 사람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나는 트렌드와 시장 기회만을 찾아서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비즈니스 맨이 되기 보다는,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장에 선보이는 예술가이자 inventor가 되고 싶다.



인간 관계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을 수록 나의 젊음과 삶이 유한하다는 것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 현재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사실도. 내가 바라는 삶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며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나의 꿈이 그러한 삶 자체는 아니지만, 인생에 있어 매우 큰 요소임에 틀림없다.

관점이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좋다. 특정 주장에 맹목적으로 동의한다거나, '음 그냥 맛있어요' 정도의 태도를 취한다거나, 일상적 사례를 들어 피상적 결론을 내거나, 순환 논리에 머무르는 대화에는 깊이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자신의 삶과 어떤 사안에 대해 저 깊이까지 고민해본 사람과 대화를 나눴을 때는, 이 생각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들을 수 있고 그 외부 관점과 나의 관점이 부딪히거나 조화를 이루며 세상이 넓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내 인간관계의 출발은 지금까지 대부분 학교였는데, 이제 학교와 꽤나 멀어진 지금, 사회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람을 만나야할 지가 너무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내던져진 느낌..


여전히 헤메고 있다. 무분별한 비교는 나를 멍들게 한다. 올해 더 많은 걸 이뤄내보자. 힘내자. 사랑하고, 행복하자!

보통 이맘때면 몸이 아프곤 했다. 생일 즈음해서, 학창 시절 때부터 그랬다. 올해는 별 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나 하던 찰나에, 그저께부터 목이 조금씩 아파왔다. 견딜만했는데, 오늘 갑자기 큰 피로가 몰려와서 일찍 집에 들어왔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여러 잡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근에 치원이형이랑 이야기하면서, 글쓰는게 어렵다고 푸념하듯 늘어놓았다. 글은 네가 쓰고 싶을 때 쓰는 거고 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굳이 써야하나 라는 그의 말에 그런가 싶으면서도, 일종의 종교 의식같이 내 삶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나의 감정과 상태에 대해 조금 더 면밀히 진단할 수 있으니, 의지에 맡기는 대신 의무를 지우는 것도 좋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년 회고를 썼었다. 2024년 까지는 그랬다. 지금이 2026년 3월이니까, 2025년에 대한 글은 아직 없다. 이 글의 목적이 작년에 대한 회고는 아니겠지만, 뭐 새해 1분기에 작성하는 글이니, 적당히 작년 회고로도 퉁쳐보려고 한다. (이왕 몇 년째 회고를 썼으니 계속 이어가보자는 생각인가)


몇 가지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나의 일과 삶에 대한 생각이다.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와도 다소간 맞닿아있다. 나는 이 산을 넘어야만 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지.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가야만 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체제, 자본주의,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 정도. 게임이랑 유사하다. 캐릭터의 특성과 게임 내 규칙을 알아야만, 전략적으로 플레이해서 좋은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지난한 고민의 산물이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속에 내 개성과 철학이 담겨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유용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받고 그들의 삶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싶었다. 일종의 정복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마냥, 사람들에게 내 에고를 감염시키기 — 뭐 이런 욕망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한다면, 이기적인 유전자의 동작일 지라도 나름 괜찮은 욕구의 표출이라고 생각했다.

각설하고,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했다. 소프트웨어가 좋아서는 아니다. 나는 공간을 구성하거나, 작동하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적지 않은 관심이 있다. 단지 초기 비용이 가장 덜 들면서 임팩트는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발현할 수 있는 가치의 상한도 명확해보였지만, 어쨌거나 나의 소결론은 전세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용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내 생산성을 발휘해서 현금흐름을 수취하고, 그것으로 다른 회사의 유가증권을 취득하여 자산을 만들어가는 방안도 있었지만, 난 처음부터 나의 자본(equity)을 키워가는 방향을 견지하고자 했다. 이것은 사회 구조 상, 젊은 나이에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가지기 어렵다는 구조적 원인과, 앞서 언급한 창작욕과 정복욕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이것이 내가 스타트업을 시작한 이유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지난 몇 년 간 작성한 회고의 주를 이루고 있다. 어찌보면 많이 퍽퍽하다. 마치 근성장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음식이 닭가슴살이지만, 그 맛은 장담못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

결론이 나있는 상황이면, 그 결론을 붙들어매고 성과를 내면서 나아가야한다. 그 다음에서야 내가 나를 돌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취에 너무나도 목말라있으니까. 지금 Arky라는 도구를 만들고 있는 데,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결정해야할 것들이 산더미이고, 매일매일 새로운 이슈가 터진다. 내가 일이고, 일이 곧 나인 상황에서, 한가로이 나에 대해 골몰할 여유가 없다고 느껴졌다. 피로사회 한병철 저자가 짚은,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자기착취의 폭주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색적 삶과 멀어져 버린 것인가? 나=일이면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게 결국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쓸 여유가 없다고 느껴졌나보다. 그럼에도 요즘들어 떠오르는 주제가 몇 가지 있었고, 오늘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을 기념하여, 몇 자 적어본다.


우선 드는 생각은 주의집중력이다. 종이에 적다가 지금 Arky에 적고 있는데, 표현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너무 답답하다.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기 전에 다른 주제로 튀어버리면, 그 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가 어려워진다. 마치 요즘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쇼츠/릴스로 주제가 계속해서 바뀌어버리고, 특정 콘텐츠에 깊이있게 몰입하는 게 더욱 어려워진 세상, 집중력이 결핍된 세상.. 집중은 곧 몰입이고, 러너스 하이와 유사하게 지적활동을 하며 오는 카타르시스가 존재할 것인데, 인간의 지능이 점차 외주화되어가는 지금, 인간의 존재의미는 결국 쾌락과 유희활동에서 찾아야하는 것인가 — 라는 심오한 생각까지가 한 턴에 났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추상적인 개념과 눈앞에 나타난 실제 대상 사이의 갑작스러운 불일치를 깨달을 때 유머가 발생한다고 했다. 나의 생각 발산 속도가 유머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쨌든 나도 생각이 되게 산만하다는 것..

사실 이런 철학자들의 정의를 차용할 때도, 그 철학자에 대한 존중여부를 차치하고 생각한다해도, 너무 권위에의 호소와 무비판적 사고의 가속을 부르는게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물리 법칙이나 특정 이론에 대한 인용이 아니라 어떤 구절에 대한 인용은, 마치 속담같이 들리는데, 그것이 철학자의 멋들어진 이름과 만나게 되면 뭔가 그럴듯해보이면서 수긍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내가 너무 삐딱한가 싶다가도.. 뭐 그렇다.



최근에 재호와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소 심오한 내용이었다.

크리에이터 문상훈은 본인의 v-log 영상에서 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나를 태교하는 것처럼 지내기로 했다. 몸에 좋은 것을 주고 좋은 마음을 갖고 살면 아이에게 좋듯이, 나에게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양품이다. 뭐 하나가 나와도 되게 좋은 것. 내가 생각하는 양품은 비싸지 않아도 된다. 이게 내가 엄청 많이 적었던 Blackwing이라는 연필인데 ... 글씨 쓰는게 난 너무 좋다. 셀카 잘 나온 것처럼 기분이 좋은데, Blackwing이 왜 양품이라고 생각하냐면, 글씨가 잘 써지는 건 너무 당연한건데, 이 연필 지우개가 다른 연필 지우개랑은 달리 굉장히 잘 지워진다. 연필치고는 비싸냐? 비싸다. 기분 전환을 위해 쓰는 비용에 비해 비싸냐? 비싸지 않다.'


나도 제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좋은 제품, 양품을 만들고 싶었다. 좋은 만듦새를 가진 무언가. 그 좋은 만듦새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디테일이다. 그럼 그 디테일이 뭔데? 어떻게 만드는데?


문상훈씨가 짚은, Blackwing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 무언가를 작성할 때 중요한가? 연필이라면 잘 나오면 그만 아닌가? 지우개는 따로 사서 쓰면 되잖아.

나는 세심함에서 좋은 디자인이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세심함은, 사려깊음에서 나온다. 여러 감각을 이용해 세상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게 되는 배움을 어딘가에 쌓아놓았다가, 제품을 만들 때 자연스레 응용하는 것이다.

언젠가 디자인을 배웠다고 해서 모두 디자인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다소 건방진 말이지만) edge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뭔가 학습이나 커리큘럼 상에서의 단련에서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전적인 영향도 물론 있을 테지만 그건 모든 영역이 그러할 것이고, 내 감각이 얼마나 민감한 지, 세상으로 부터 오는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만의 관점으로 체득하는 지에서 좋은 디자인이 출발한다고 생각했다.

Notion을 만든 Ivan, Cursor의 head of design을 맡고 있는 Ryo, 애플 전성기를 만들었던 Jony, 무인양품 디자인을 총괄한 Hara, 브라운의 디자인을 이끌었던 Dieter까지, 그들이 단순히 스킬셋이 좋아서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UX라고도 표현하지만 — 결국 사람의 경험에 대한 심도있는 고민과 자신만의 관점이 적절히 섞여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걸 직관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결론적으로는 그런 산물이 직관으로 나타나는거라고 생각한다. 가구를 만들든, HCI, HAI를 설계하든 간에 본질은 유사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제품들에는 공통적으로 '브랜드스러움'이 담겨있다. 어떤 부족사회를 만들어낸다. 제품을 매개로 말이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양품의 정의다. 유용하되, 브랜드스러워야 한다. 브랜드스럽기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의 철학적 배경과 관점이 제품에 오롯이 담겨있어야 하고, 좋은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면 세심함을 챙겨야만 한다. 이것은 성향적인 요인도 클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양품이 대중화될 수 있는가?, 아니 반대로는 대중화된 무언가가 양품일 수 있는가? 라는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무인양품이나 애플이 이러한 고민을 불식시켜주고는 하는데, 순수 예술이 되지 않으려면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하고, 그러려면 충분한 유용성이 합리적인 가격대에 제공되어야 한다.


미감, 감도, 혹은 느좋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되는 것 같다. 주변에 옷 입는 것만 봐도 그런 느낌이 드는 친구들이 몇몇 있다. 그들은 감각적이다. 감각적인 이들을 따라하려고 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 authentic함에서 오는 멋이, 그들을 고유하게 만들어준다. 어떠한 심상이 느껴진다는 게 맞는 표현같다. 시각, 후각, 청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추상적인 느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걸 느끼는 것 또한 직관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앞서, '자아'라고 말했는데, 내가 추구하는 미(美)를 세상에 퍼뜨리고 사람들에게 감응시키는 것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것 같다. 그저 그런 자동차를 만드는 게 아니라, 포르쉐를 만들고 싶었던 사람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나는 트렌드와 시장 기회만을 찾아서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비즈니스 맨이 되기 보다는,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장에 선보이는 예술가이자 inventor가 되고 싶다.



인간 관계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을 수록 나의 젊음과 삶이 유한하다는 것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 현재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사실도. 내가 바라는 삶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며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나의 꿈이 그러한 삶 자체는 아니지만, 인생에 있어 매우 큰 요소임에 틀림없다.

관점이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좋다. 특정 주장에 맹목적으로 동의한다거나, '음 그냥 맛있어요' 정도의 태도를 취한다거나, 일상적 사례를 들어 피상적 결론을 내거나, 순환 논리에 머무르는 대화에는 깊이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자신의 삶과 어떤 사안에 대해 저 깊이까지 고민해본 사람과 대화를 나눴을 때는, 이 생각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들을 수 있고 그 외부 관점과 나의 관점이 부딪히거나 조화를 이루며 세상이 넓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내 인간관계의 출발은 지금까지 대부분 학교였는데, 이제 학교와 꽤나 멀어진 지금, 사회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람을 만나야할 지가 너무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내던져진 느낌..


여전히 헤메고 있다. 무분별한 비교는 나를 멍들게 한다. 올해 더 많은 걸 이뤄내보자. 힘내자. 사랑하고,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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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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